나를 프라하로 이끈 것은 고풍스러운 도시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프라하가 얀 후스 등에 의하여 세계 최초로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세계 최초로 개신교 도시가 되었던 도시라는 사실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비텐부르크 등 독일의 작센지역, 칼뱅과 쯔빙글리가 종교개혁을 한 스위스의 제네바와 취리히, 존 락스에 의하여 장로교회가 시작된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등도 방문하여 종교개혁의 흔적을 느끼고 싶기는 하지만 이들보다 100년 이상 빠른 시기 얀 후스 등에 의하여 세계 최초로 종교개혁이 진행되었던 프라하를 가장 먼저 오고 싶었다.
체코에서의 얀 후스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를 뛰어넘는 체코의 민족 영웅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얀 후스의 동상은 후스가 화형된 후 500년이 되는 해인 1915년 프라하의 중심인 구시가 광장에 세워졌다.
얀 후스의 동상 왼편에는 성배 문양이 새겨진 방패를 들고 있는 후스파 전사들이 있고, 오른쪽에는 반종교개혁 시절 추방당한 후스파 성도들의 동상이 있다.
동상의 앞면에는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를 요구하십시오.”라는 얀 후스가 화형 당하기 전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의 내용이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나의 민족이여 부디 살아남으십시오. 당신의 나라가 당신에게로 돌아올 것입니다”라는 민족을 위한 기도가 새겨져 있다.
구시가지 광장에서 얀 후스의 동상을 바라 보면 왼쪽에 체코 개혁운동 초기부터 체코어로 설교한 성미쿨라쉬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현재 후스의 정신을 이어 받은 체코복음형제운동본부로 사용되고 있다.
띤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는 1365년에 건립된 프라하 구시가지를 대표하는 상징적 건물로 고딕 양식의 80미터 높이의 첨탑이 유명하다.
띤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는 프라하의 제롬이 영국 유학 후 귀국하여 성경만이 진리라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강론을 한 곳으로 그의 강론이 얀 후스와 밀리치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종교개혁 시대에는 가장 유명한 후스파 교회로 후스파의 종교회의가 열린 곳이며 주변에 있던 띤 사제관은 이종성찬 교회들을 관리하던 개혁파 종교의회가 있었던 곳이다.
그렇지만 30년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체코와 프라하 지역이 다시 카톨릭화 되면서 종교개혁의 상징이었던 황금 성배(성경과 성찬의 잔)를 녹여 탑의 성모 마리아상을 만들었다.
베들레헴 채플은 1394년에 완공된 교회로 후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프라하 종교개혁의 중심지다. 프라하 대학 총장인 얀 후스 등이 체코어로 교황이 지배하는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설교를 했고, 설교는 후스에 대한 교황의 파문 후에도, 후스의 순교 후에도 계속되었다. 체코어로 3,000번 이상의 설교가 이루어진 곳이며, 면죄부를 반대하는 후스의 주장에 동조하였다는 이유로 순교한 세 명의 청년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베들레헴 채플 인근에는 신학생들을 위한 숙소가 있던 곳으로 성경만이 진리라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받아드린 얀 밀리치가 막달라마리아 채플을 포함하여 프라하의 매춘부를 위한 임시 복지시설인 예루살렘을 설립하는 등 종교개혁의 기초를 닦은 학사지역이 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벽 속의 마르띤교회였다. 이 교회는 원래 로마네스크 양식이였는데 1350년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되었고, 13세기 구시가 성벽이 완공된 이후 교회의 벽이 성벽과 이어지면서 독특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벽 속의 마르띤교회는 후스가 사제 서품 이후 처음으로 설교한 곳이고, 1414년 공식적으로 최초의 이종성찬예배를 시작한 곳으로 이번 여행 중 내가 가장 방문하고 싶은 곳이었는데, 딸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찾아 방문할 수 있었다.
구시가 광장에서 하벨시장 방향으로 내려오면 체코 개혁운동의 중심지이자 출발지인 까렐 대학 강당으로 종교개혁의 신학적 이론이 정립된 곳인 까를리늄을 만날 수 있다.
얀 후스가 1410년 까렐대학에서 본격적이 종교개혁을 일으켜 까롤리늄에서 면죄부 판매에 대한 공개 논쟁이 있었고, 이후 개혁교도들의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또한 1420년 까롤리늄에서 라틴어가 아닌 체코어로 자유롭게 설교해야 하고 성찬에서 모든 성도들에게 떡과 함께 포도주를 나누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된 프라하 4개 조항이 발표되었다.
그런데 지금 까롤리늄에서는 북한 관련 전시회를 하고 있어 조금 황당하기도 했다.
벽 속의 마르띤에 이어서 종교개혁 시대에 이종성찬을 시행하며 개혁에 동참한 성일리교회, 성미할교회와 눈 속의 성모마리아 교회를 찾았다.
까롤리늄 인근에 까렐4세 재위 시절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콘라드 발트하우저와 얀 밀리츠가 활동하였고 이종성찬을 시행한 성하벨교회도 보았다.
직접 후스의 종교개혁과 관련된 곳은 아니지만, 1419. 7. 30. 후스파 안젤립스키를 중심으로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다 이를 거부하던 시장, 판사 등 7명의 의원들을 창문 밖으로 집어던졌던 1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이 있었던 신시청사를 찾았는데, 1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은 후스 전쟁의 단초가 되었다.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된 제2차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이 있었던 프라하성 구왕궁이다. 제2차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으로 발생한 30년 전쟁에서 보헤미아 군이 백산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가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프라하성의 황금소로의 마지막에 있는 지하 감옥인데, 보헤미아가 백산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보헤미아를 이끌었던 후스파 들이 투옥되었던 곳인 것 같다.
까를교의 구시가 방면의 교탑이다. 고딕양식의 아름다운 건물이고, 교탑 위에서는 아름다운 프라하의 전경을 볼 수 있는 곳이지만, 보헤미아가 백산전투에 패배한 후 참수한 개혁파 지도자들을 목을 20여년 간 매달아 놓은 곳으로 후스의 종교개혁과도 연관이 있다.
얀 후스의 종교개혁 유적지 몇 곳을 방문하면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탄압과 박해, 죽음만 있는 일을, 오히려 하지 않았으면 충분히 성공한 삶을 살았을 일을, 오직 하나님을 위해 행했던 신앙 선조들의 믿음 앞에 머리가 숙여지는 시간이었고, 그분들이 만난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 되심을 감사하는 시간이었다.
프라하 여행을 계획하면서 얀 후스의 흔적을 찾고 싶었으나 막막했는데, 프라하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의 책을 알게 되어 이 책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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