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을 준비하면서 얀 후스에 대한 묵상
세계사를 공부할 때 루터 이전의 종교개혁자로 후스라는 이름만 들었으나 특별한 관심은 없었는데 공군교회에서 안수집사 임직을 앞두고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얀 후스에 대하여 한 번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체코와 프라하를 여행할 기회가 생기면서 프라하에서 얀 후스의 흔적도 찾아보고 싶다는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터넷 등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얀 후스에 대한 자료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지만 다행히 프라하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이 번역한 ‘걸어서 가보는 프라하 종교개혁 이야기’라는 책을 만날 수 있어 얀 후스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고, 프라하 여행 계획 수립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얀 후스는 프라하 카렐 대학교의 신학교수와 총장을 역임했던 보헤미아 왕국의 종교개혁자로 마르틴 루터보다 100년 앞서 종교개혁사상을 외친 종교개혁의 선구자이며, 보헤미아 왕국의 독일화 정책을 반대한 체코의 민족적 영웅이다.
그는 영국의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교회의 전통이나 교황의 권위가 아닌 성경의 절대적 귄위를 강조하였고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면죄부 판매 등을 비판하였으며, 성경을 체코어로 번역하고 베들레헴 채플 등에서 민중들에게 라틴어가 아닌 체코어로 설교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또한 얀 후스는 위클리프의 만인 제사장설을 좀 더 발전시켜 외형적으로도 사제와 평신도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당시 신부들만 포도주를 마시는 성찬식을 일반 성도들도 사제와 같이 포도주에 참여하는 이종성찬으로 바꾸어 진행했다.
얀 후스는 성경의 절대 권위를 주장한다는 등의 이유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살해 위협을 당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앙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그는 1415년 이단으로 낙인찍혀 화형 당했고, 그와 동시에 얀 후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위클리프도 부관참시를 당하는데 순교할 때 얀 후스의 나이는 불과 40대 중반이었다고 한다.
후스는 화형을 당하기 전 “오늘 당신들은 볼품없는 한 마리의 거위(체코어로 후스는 거위라는 뜻)를 불태우지만 100년이 흐른 뒤에는 영원히 태울 수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하는데, 그의 말대로 1세기 후 독일에서 후스의 신앙과 사상을 계승한 마르틴 루터라는 백조가 나타나 종교개혁을 시작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만을 찾아라. 진실만을 들어라. 진실만을 배워라. 진실만을 사랑하라. 진실만을 말하라. 진실만을 지켜라. 죽음을 두려워 말고 진실만을 사수하라.”라는 얀 후스의 유언은 프라하에 세워진 얀 후스의 동상에도 새겨져 있다고 한다.
얀 후스가 화형되었어도 얀 후스의 사상은 사라지지 않고, 까렐대학을 중심으로 얀 후스의 동료들에 의하여 계승되어 보헤미아의 프라하는 세계 최초의 개신교 도시가 되었고 이후 그의 사상은 루터 등의 종교개혁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루터도 자신이 얀 후스의 사상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보름스 의회가 열렸던 보름스의 루터 광장에 루터와 함께 얀 후스와 위클리프의 동상이 있는 것만 보더라도 얀 후스가 루터의 종교개혁에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을 알 수 있다.
얀 후스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얀 후스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간절함은 40대 중반에 순교한 얀 후스보다 10년 이상을 더 살아 50대 후반이 되어 가지만 갈수록 종교적 매너리즘에 빠져 점점 더 형식적인 종교인이 되어 가고 있는 나에게 큰 도전을 던져 주었다.
이번 프라하 여행에서 나는 얀 후스가 체코어로 설교했던 베들레헴 채플과 최초로 이종성찬이 행해졌던 벽 속의 마르띤 교회, 얀 후스가 근무했으며 보헤미아 개혁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까렐대학의 까롤리늄, 그리고 보헤미아 개혁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띤 앞의 성모마리아 교회, 성하벨 교회, 성미꿀라쉬 교회, 성미할 교회, 눈 속의 성모마리아 교회 등을 둘러보며 하나님의 사람 얀 후스와 얀 후스가 사랑한 하나님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얀 후스와 맥주 그리고 프라하 + 0
체코는 음악 시간에 들었던 보헤미아 지역 중심의 국가인데 모라비아 왕국이 보헤미아 왕국에 복속되면서 현재의 체코의 영토를 이루었다.
체코는 신교와 구교의 종교전쟁이었던 30년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오랜 기간 합스부르크 왕가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차 대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하였다가 구 소련이 해체로 동구 사회주의권도 해체되면서 1993년 슬로바키아인이 대다수인 슬로바키아가 체코슬로바기키에서 독립하여 현재의 체코가 되었다.
프라하는 보헤미아 왕국 시절부터 수도였던 도시로 백탑의 도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불리며 지리적으로 유럽의 중심에 있다는 이유로 유럽의 심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방송과 SNS 등을 통해 알게 된 프라하라는 도시는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사람을 끌리게 하는 매력이 있는 도시로 다가왔고, 언제부턴가 나의 버켓리스트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작은 딸이 한 학기 동안 체코 올로모오츠 팔라츠키 대학에서 교환학생을 가게 되어 10월 초순 공휴일이 있는 기간을 이용하여 큰 딸과 함께 작은 딸을 만나러 가면서 프라하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아내와 함께 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이 아쉬움은 3주 후에 함께 갈 시안 여행으로 달래기로 하고....
나를 프라하로 이끈 것은 고풍스러운 도시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프라하가 얀 후스 등에 의하여 세계 최초로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세계 최초로 개신교 도시가 되었던 도시라는 사실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비텐부르크 등 독일의 작센지역, 칼뱅과 쯔빙글리가 종교개혁을 한 스위스의 제네바와 취리히, 존 락스에 의하여 장로교회가 시작된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등도 방문하여 종교개혁의 흔적을 느끼고 싶기는 하지만 이들보다 100년 이상 빠른 시기 얀 후스 등에 의하여 세계 최초로 종교개혁이 진행되었던 프라하를 가장 먼저 오고 싶었다.
체코하면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은 맥주다. 체코는 독일 못지않게 맥주가 유명하고, 일인당 맥주 소비량이 세계 1위인 나라로 프라하에 도착해서 확인해야 하겠지만 물보다 맥주가 저렴하기까지 한 나라라고 한다.
체코의 플젠 지방은 저온으로 발효하는 라거 맥주의 고향이며, 코젤이나 필스너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맥주가 생산되고 있고, 또한 이런 브랜드 뿐 아니라 지금도 수많은 양조장과 심지어 수도원에서까지 직접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생산하여 현장에서 판매한다고 한다.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가 먹는 즐거움인데 검색을 해 보아도 크게 먹고 싶은 음식이 없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되는 음식이 체코의 다양한 맥주들이며, 운전할 일이 없는 여행기간 동안 저녁뿐 아니라 점심에도 물이나 음료수 대신 간단하게 맥주를 한 잔씩 마시면서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위대한 종교개혁자인 얀 후스와 맥주 이 두 가지는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나에게 이번 여행의 큰 주제는 얀 후스와 맥주이다. 그래서 만약 여행을 마치고 기행문을 적게 된다면 그 제목을 ‘얀 후스와 맥주, 그리고 프라하’로 할까 한다.
부산 김해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가서 바로 프라하행 대한항공으로 환승하여 출발하는 7박 9일의 여행. 프라하에서 5박, 올로모오츠에서 2박을 하면서 동화의 도시라고 하는 체스키크롬로프와 독일의 드레스덴을 당일 여행으로 다녀올 계획이다.
작은 딸과는 2년 전 이집트를 10일 정도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지만, 두 딸과 함께 셋만의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다.
7박 9일이라는 짧지 않는 기간 사무실을 비운다는 것이 많은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의 첫 동유럽 여행인 체코 여행이 기대된다.
얀 후스와 맥주, 그리고 프라하 D+1
어제까지 출근해서 사무실 업무를 마무리했고, 오늘 새벽 5시 40분 택시로 김해공항으로 이동하여 8시 35분 인천공항으로 가는 대한항공 항공기에 올라 체코 여행을 시작했는데 인천공항 제2터미널에 도착하여 프라하행 항공기로 간단하게 환승하여 프라하로 출발했다.
그런데 출발 직전 공항 인근에서 미확인 풍선이 발견되어 출발이 거의 2시간이 지연되었다. 북한의 쓰레기 풍선이 나와 관련 있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역시 나는 김정은과는 맞지 않는 모양이다.
인천공항에서 프라하 직항이 한 주에 4편이 있는데 거의 만석이라는 것을 보면 직항으로 프라하를 방문하는 사람만 매주 1,000명 이상이고, 환승이나 다른 도시를 통해 프라하를 방문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우리나라에서 프라하를 찾는 사람은 매월 거의 1만에 이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으로 신청해 본 특별기내식으로 해산물을 신청해 먹고, 지인이가 신청한 과일식까지 먹고, 평생 안 보던 영화도 보고, 다운 받은 유튜브도 보고 해도 대기시간 포함 15시간은 너무 길었다.
운행정보를 보니 고도 약 11,000미터, 외부온도 -55도, 풍속 132km/h, 대지 속도 837km/h였다. 영하 50도 이하의 11킬로의 높이에서 시속 132kn의 맞바람을 뚫고 비행기가 시속 800km 이상으로 날아간다는 것이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간식으로 나온 연어 샐러드와 과일에 이어 기내식으로 한 번 사육 당한 후 집에서 출발한지 거의 20시간이 지난 프라하 시간으로 오후 6시가 넘어 바츨라프 하벨 공항에 도착했다.
한글로 된 한국인 전용입구장 표시를 따라가서 간단히 입국 절차를 마치고, 볼트를 불러 바츨라프 광장과 무스테크 광장 바로 앞에 있는 이틀을 지낼 프라하인 호텔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작은 딸을 만났다.
그리고 비 오는 프라하의 밤길에서 쌀쌀함과 함께 낭만을 즐기며 슈니첼, 치즈튀김에 흑맥주 한 잔을 하고 호텔에 돌아와 7시간이 추가된 하루를 마무리했다.
얀 후스와 맥주 그리고 프라하 + 2
예상대로 시차 때문에 새벽 4시경에 눈이 떠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프라하에는 비가 내린다. 일기예보에는 오늘은 오전에 계속 비가 오고, 기온도 10도 이하로 쌀쌀하다고 한다.
호텔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정류장까지 20분을 걸어 독일로 가는 2층 버스를 타고 작센주의 드레스덴으로 향했다. 당연한 것이지만 버스 2층에는 기사가 없어 맨 앞자리부터 승객들이 타는 것이 이채로웠다.
8시 30분 출발한 버스는 지평선이 보이는 도로를 약 2시간을 달려 드레스덴에 도착했는데, 북한으로 인해 사실상 섬나라인 우리나라에 살다 보니 육로로 국경을 넘는 경험은 언제나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체코와 독일의 국경을 넘으면서 통신회사도 자동으로 독일회사로 바뀌었고, 내가 방문한 외국에 독일이 체코에 이어 추가되었다.
드레스덴은 독일 작센 주의 주도로, 도시 곳곳에 산재해 있던 바로코 양식의 건축물들로 인해 엘베강의 피렌체로 불린다.
2차 대전 종전 직전 대규모의 폭격으로 거의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으나 동독 시절에는 제대로 재건이 되지 않다가 독일 통일 후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드레스덴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걸어서 13세기에 형성된 드레스덴 구시가지의 중심 광장인 알트 마트크트 광장으로 향했다. 알트 마트크트 광장은 수확 축제가 열리고 있었는데, 공연을 위한 무대와 소규모 놀이기구 그리고 각종 푸드트럭 등으로 인해 복잡했다.
광장을 떠나 드레스덴을 대표하는 건축물인 프라우엔 교회로 갔는데 프라우엔 교회란 ‘성모교회’라는 의미의 루터교회로 종교개혁 이후인 18세기 초 기존에 있던 주교좌 성당을 허물고 바로크 양식으로 건었고, 종 모양의 석조돔으로 인해 약 200년간 드레스덴을 상징과도 같은 곳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프라우엔 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으로 파괴되었고, 동독 시기에는 교회 재건에 무관심하여 잔해를 그대로 두는 바람에 역설적으로 전쟁의 비극을 알려주는 평화 운동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으나, 독일 통일 후 2005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각국 민간 단체의 도움으로 60년만에 재건되었다.
프라우엔 교회 내부는 황금빛 제단이었으나 생각보다는 소박했다. 루터가 작사한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읊조리며 교회를 나왔다.
프라우엔 루터교회 앞에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동상이 서 있다.
마르틴 루터가 1517. 10. 31. 비텐베르크성의 성당 문에 개시한 95개조의 반박문은 쿠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에 덕분에 순식간에 전 독일어권으로 전파되었다. 루터가 파문 당한 후에는 작센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보호를 받았는데, 루터의 동상이 서 있는 드레스덴이 작센주의 주도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에는 프라하에서 그 유적을 살펴보려고 하는 얀 후스의 사상이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루터는 루터파 신자들에게 “알든 모르든 우리는 모두 후스파”라고 하여 자신의 주장이 얀 후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1415년 얀 후스가 화형 당하면서 “너희는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태워 죽이지만 100년 후에는 태울 수 없고, 삶을 수도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하는데, 얀 후스 사후 102년만에 루터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든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드레스덴을 방문하면서 이번 여행에서 만나고 싶었던 얀 후스보다 그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을 성공시킨 루터를 먼저 만나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묵상할 수 있었다.
프라우엔 교회 다음으로 방문한 브륄의 테라스는 1737년 브륄 백작이 엘베강가를 따라 도시를 지키던 성벽을 정원으로 만든 곳으로 괴테가 유럽의 발코니라고 칭찬하였으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음은 드레스덴 대성당. 드레스덴 궁정교회로 불리는데 이 건물 역시 2차 대전 시기 파괴된 것은 기존의 벽돌 등을 이용하여 다시 재건한 건물이다.
18세기 프라우엔 교회가 건축되는 등 루터교가 성장하고 카톨릭이 힘을 잃어가는 작센공국을 다시 카톨릭화 하기 위하여 아우구스트 2세가 건축한 성당으로 이 성당이 건축되는 시기가 작센 공국의 전성기였고, 이 성당은 드레스덴의 최고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 중 하나로 여겨진다.
대성당은 바로코 양식으로 높이는 83미터에 달하고 성당 난간에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등 78개의 동상이 있고, 왕궁교회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16세기부터 약 400년간 작센 공국의 선제후가 사용했고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 중인 레지덴츠 궁과 다리로 이어져 있다.
레지덴츠 궁전 옆 건물의 벽에 새겨진 군주의 행렬은 1127년부터 1904년까지 작센지방의 군주 35명과 과학자, 농부, 어린이 등 59명 등 총 94명의 사람들이 행진하는 모습을 도자기 타일을 붙여 만든 벽화로 길이는 102미터에 이르며 2차 세계대전의 폭격에도 살아남은 드레스덴의 산역사이다.
군주의 행렬은 처음에는 왕실 마굿간이었던 슈탈호프 외벽에 그린 벽화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림이 소실이 되자 당시 최고의 미술가였던 빌헬름 발터가 1907년 충격에 견딜 수 있도록 2만 3천여개의 마이센 도자기를 붙여 만들었고, 이 때문에 군주의 행렬은 2차 대전의 폭격에도 파괴되지 않았다고 한다.
군주의 행렬까지 구경한 다음 다시 알트 마트크 광장으로 가서 소세지와 감자 요리, 맥주 등으로 점심을 먹었다. 맛은 괜찮았지만 간단한 메뉴였는데도 독일의 물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츠빙거 궁전으로 갔다. 츠빙거 궁전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 자극을 받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왕에 의해 본래 성벽 외박 대포를 설치했던 구역에 여름 별장으로 건축된 곳으로 독일 바로크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이 역시 2차 대전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1960년대에 재건된 건물이다
츠빙거 궁전 내부에는 역사 박물관, 도자기 박물관, 거장 박물관 등 5개의 박물관이 있고 거장 박물관에는 라파엘로, 램브란트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실내는 패스했고, 아름답다는 정원은 공사 중이라 제대로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츠빙거 궁전 앞에는 1878년 그 당시 가장 유명 건축가인 고트프리트 젬퍼가 건축한 오페라 극장인 젬퍼 오페라 하우스가 있다.
공사로 인해 츠빙거 궁전의 모습은 제대로 보지 못했으나 츠빙거 궁전 건물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하며 드레스덴 일정을 마무리했다.
프라하로 돌아와 저녁은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코젤로브나에서 타르타르(육회)와 굴라쉬(국물이 있는 쇠고기 조림) 그리고 스비치코바(크림이 들어간 쇠고기 스튜)에 코젤 맥주를 곁들어 먹었는데 생각보다 맛있었고, 미리 예약한 딸들 덕분에 기다리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체코 여행을 시작할 예정지만 돌아오면서 까를교와 천문시계는 둘러보았다.
얀 후스와 맥주 그리고 프라하 + 3
새벽에 혼자 까를교를 산책했다. 어제 밤과 달리 한적하게 까를교를 걸으면서 블타바강과 프라하성을 감상할 수 있었다.
호텔 조식을 먹고 체크아웃한 후 캐리어를 호텔에 맡겨놓고 프라하를 돌아다녔는데, 오전에는 얀 후스의 흔적을 따라 사실상의 종교개혁 성지순례를 했다.
호텔에서 나와 처음 찾은 곳은 체코 역사의 중심이 된 광장으로 체코의 독립이 선언되었고, 소련에 저항한 민주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의 중심이 된 바츨라프 광장이었다.
이곳은 보헤미아 수호성인 바츨라프 1세 공작의 이름을 붙인 곳으로 광장의 이름에 맞게 바츨라프의 기마상이 서 있다.
다음은 1419. 7. 30. 후스파 안젤립스키를 중심으로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다 신시청사로 들어가 이를 거부하던 시장, 판사 등 7명의 의원들을 창문 밖으로 집어던져 후스전쟁의 단초가 되었던 1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이 있었던 신시청사를 찾았다.
이어서 복원된 베들레헴 채플로 향했는데, 베들레헴 채플은 1394년에 완공된 교회로 후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프라하 종교개혁의 중심지다.
이곳에서 프라하 대학 총장인 얀 후스 등이 체코어로 복음을 전하며 교황이 지배하는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설교를 하였고, 이러한 설교는 후스에 대한 교황의 파문 후에도, 후스의 순교 후에도 계속되어 베들레헴에 채플에서는 체코어로 3,000번 이상의 설교가 이루어졌으며 이곳에는 면죄부를 반대하는 후스의 주장에 동조하였다는 이유로 순교한 세 명의 청년들이 묻혀 있기도 하다.
베들레헴 채플 인근에는 신학생들을 위한 숙소가 있던 곳으로 얀 후스와 함께 성경만이 진리라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받아들인 얀 밀리치가 막달라 마리아 채플을 포함하여 프라하의 매춘부를 위한 임시 복지시설인 예루살렘을 설립하는 등 종교개혁의 기초를 닦은 학사 지역이 있어 사진을 찍어 방문의 흔적을 남겼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벽 속의 마르띤 교회였다. 이 교회는 원래 로마네스크 양식이였는데 1350년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되었고, 13세기 구시가 성벽이 완공된 이후 교회의 벽이 성벽과 이어지면서 벽 속의 마르띤 교회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벽 속의 마르띤교회는 후스가 사제 서품 이후 처음으로 설교한 곳이고, 1414년 공식적으로 최초의 이종성찬 예배를 시작한 곳으로 이번 여행 중 내가 가장 방문하고 싶은 곳이었는데,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딸들의 노력으로 방문할 수 있었다.
벽 속의 마르띤 교회 방문을 마치고 이 교회에서 이종성찬을 시작한 이후 이어서 이종성찬을 시행한 성일리교회와 성미할교회를 거쳐 구시가 광장으로 향했다.
프라하 구시청사가 있는 구시가 광장 중심에는 나를 프라하로 이끈 얀 후스의 동상이 서 있다.
체코에서의 얀 후스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를 뛰어넘는 체코에서의 독일화 정책에 반대한 체코의 민족 영웅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얀 후스의 동상은 후스가 화형된 후 500년이 되는 해인 1915년 프라하의 가장 중심인 구시가 광장에 세워졌다.
얀 후스의 동상 왼편에는 성배 문양이 새겨진 방패를 들고 있는 후스파 전사들이 있고, 오른쪽에는 30전쟁에서 패배한 후 반종교개혁 시절 추방당한 후스파 성도들의 동상이 있다.
동상의 앞면에는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를 요구하십시오.”라는 얀 후스가 화형 당하기 전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의 내용이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나의 민족이여 부디 살아남으십시오. 당신의 나라가 당신에게로 돌아올 것입니다”라는 민족을 위한 기도가 새겨져 있다.
구시가 광장에서 얀 후스 동상의 오른쪽에 있는 띤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는 1365년에 건립된 프라하 구시가지를 대표하는 상징적 건물로 고딕 양식의 80미터 높이의 첨탑이 유명하다.
프라하의 제롬이 영국 유학 후 귀국하여 성경만이 진리라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강론을 한 곳으로 그의 강론이 얀 후스와 밀리치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종교개혁 시대에는 가장 유명한 후스파 교회로 후스파의 종교회의가 열린 곳이며 주변에 있던 띤 사제관은 이종성찬 교회들을 관리하던 개혁파 종교의회가 열린 곳이다.
그렇지만 반종교개혁 후 다시 카톨릭교회로 바뀌면서 얀 후스의 종교개혁의 상징이었던 황금 성배(성경과 성찬의 잔)를 녹여 탑의 성모 마리아상을 만들어 지금까지 마리아상은 성당 중앙에 붙어 있다.
구시가 광장의 틴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의 반대편에는 얀 후스 이전 체코개혁운동 초기부터 체코어로 설교한 성미쿨라쉬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는 성경 중심과 성만찬의 거룩한 공동체 운동이 있는 곳으로 현재 체코복음형제운동본부로 사용되고 있다.
구시가 광장에서 하벨시장 방향으로 내려오면 체코 개혁운동의 중심지이자 출발지인 까렐 대학 강당으로 종교개혁의 신학적 이론이 정립된 곳인 까를리늄을 만날 수 있다.
얀 후스가 1410년 까렐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종교개혁을 일을키게 되자 이 까롤리늄에서는 면죄부 판매에 대한 공개 논쟁이 있었고, 이후 개혁교도들의 회의가 까롤리늄에서 열리기도 했다.
또한 1420년 까롤리늄에서는 라틴어가 아닌 체코어로 자유롭게 설교해야 하고 성찬에서 모든 성도들에게 떡과 함께 포도주를 나누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된 프라하 4개 조항이 발표되었다.
그런데 얀 후스의 흔적을 찾아서 간 까롤리늄에서 북한 관련 전시회를 하고 있어 조금 황당하기도 했다.
까롤리늄 인근에는 까렐4세 재위 시절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콘라드 발트하우저와 얀 밀리츠가 활동하였고 이종성찬을 시행한 성하벨교회도 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탄압과 박해, 죽음만 따르는 일을, 스스로 하지 않았으면 충분히 성공한 삶을 살았을 일을,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사명감을 가지고 행했던 신앙 선조들의 믿음 앞에 머리가 숙여지는 시간이었고, 그분들이 만난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 되심을 감사하는 시간이었다.
오전 체코 종교개혁 역사를 둘러본 후 타르타르와 구운 오리 다리에 맥주를 곁들인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유대인 거리를 둘러보고, 다시 구가지 광장으로 와서 오전에 실내를 둘러보지 못한 성미쿨라쉬 교회의 내부를 둘러본 후 걸어서 프라하 성으로 갔다.
프라하성은 목요일 다시 갈 예정이지만 목요일 날씨가 좋지 못할 것을 대비하여 사진을 찍으러 갔고, 사진을 몇 장 찍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었는데 스타벅스 커피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비쌌다.
프라성에서 걸어 호텔로 가서 짐을 찾아 프라하 중앙역으로 다시 걸어가서 역 안에 있는 버거킹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레지오젯 라운기에서 잠시 쉬다가 7시 50분 기차로 올로모오츠로 향했다.
4명이 한 칸을 사용하는 일등석이라서 쥬스 또는 와인이 제공되었고, 2시간여 달려 올로모오츠에 도착해서 바로 호텔로 향했다.
오늘 3만 5천보 이상을 걸어서 그런지 피곤해서 구시청사의 천문시계와 프라하성 그리고 까를교는 목요일에 다시 가면서 포스팅해야 할 것 같다.
얀 후스와 맥주 그리고 프라하 + 4
어제 늦게 올로모오츠에 도착해 바로 호텔로 왔으나 전날과 달리 시차 때문인지 2시간밖에 자지 못하고 호텔 조식을 먹고 올로모오츠 구시가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올로모우츠는 모라비아 왕국이 보헤미아 왕국이 흡수되기 전 약 700년 동안 모라비아 왕국의 수도였던 도시로 모라바강과 접해 있는데, 현재는 모라비아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타이틀을 브로노에게 넘겨주었지만, 체코인이 가장 좋아하고 방문하고 싶어 하는 도시라고 한다.
올로모우츠는 체코 카톨릭의 중심도시 중 하나로 인구는 10만명이 조금 넘는 정도이지만 인구 130만명의 프라하와 더불어 체코에서 단 두 개뿐인 대교구가 설치될 정도로 카톨릭 신자들이 많은 곳이다.
패키지 여행을 물론 체코에 자유여행을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올로모우츠를 방문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우리는 은진이가 팔라츠키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있기 때문에 이번 방문에서 필수 여정에 포함시킨 곳이다.
팔라츠키 대학는 올로모오츠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1573년 체코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대학으로 체코 민족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역사학자이며 철학자, 정치가인 프란티셰크 팔라츠키의 이름으로 대학명을 바꾼 대학으로 팔라츠키 대학의 학생 수는 2만명이 넘고, 동유럽에서는 드물게 한국어학과가 있는 대학이다.
올로모오츠에서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호르니 광장. 구 시청사와 성삼위일체석주, 카이사르 분수와 헬라클레스 분수 그리고 최근 만들어진 아리온 분수가 있는 곳이다.
성삼위일체 석주는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될 정도로 예술적 아름다움을 가진 중부유럽에서 가장 큰 바로코 양식의 조각상으로 이 석주는 높이는 35미터에 이르며 1층 내부에는 작은 원형 예배당이 있을 정도로 그 규모가 크다.
30년 전쟁 후 폐허가 된 올로모우츠을 재건축하고 있던 18세기 모라비아 지방을 강타한 흑사병을 퇴치한 기념으로 세워진 석주인데, 보헤미야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시에도 올로모우츠 시민들이 프로이센 군대에게 이 석주에는 포격을 하지 말라고 부탁할 정도로 올로모우츠 시민들에게 큰 의미가 있는 기념물이다.
석주의 꼭대기에는 축복하시는 하나님과 십자가를 들고 있는 예수님 그리고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로 이루어진 삼위일체상, 석주의 중앙에는 성모승천상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고 7개의 계단 위에 6면으로 이루어진 1층과 2, 3층에는 사도들과 성인들의 조각상 등의 종교적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석주의 규모에 맞게 각 조각상들의 크기도 실제 사람보다 더 크다.
또한 이 석주의 봉헌식에는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자인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참석하였을 정도로 이 석주는 건축 당시에도 중요한 정치적, 종교적 상징이었다.
그렇지만 올로모오츠에서 가장 중요한 볼거리인 성삼위일체 석주는 수리 중으로 얇은 막으로 덮여 밖에서는 웅장한 모습만 볼 수 있었을 뿐 석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할 수 없어 아쉬웠다.
성삼위일체 석주 옆에는 외벽에 천문시계가 설치되어 있는 시청사가 있다. 원래는 프라하의 천문시계와 유사한 천문시계였지만, 2차 대전 후 파괴된 것을 복구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반영하여 플로레타리아 계급을 대표하는 인형으로 변경되었고, 매 시 정각에 종은 울리는 외에는 특별한 퍼포먼스는 없었다.
호르니 광장에 이어 도르니 광장로 가서 14세기 유럽에서 창궐했던 흑사병이 종료됨을 기념하여 만든 마리아 칼럼을 보았다. 마리아칼럼은 성삼위일체 석주에 비하면 규모가 많이 차이가 났는데 나선형 기둥 꼭대기에 마리아상이 있고, 중앙에 전염병의 수호자인 베드로 동상, 나머지는 후원자들의 동상이 있다.
이어서 유럽 전체에서도 규모가 상당한 파이프 오르간으로 유명한 성모리츠 성당의 전망대를 걸어 올라가 올로모오츠의 전경을 보았는데 날씨가 좋지 않은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후 성미카엘 성당, 성요한 성당 등과 대주교의 궁전 그리고 올로모오츠에 산재해 있는 팔라츠키 대학을 둘러 보고 프라하성의 성비투스 성당의 첨탑보다 높은 첨탑으로 유명한 성바츨라프 대성당을 관람했다.
이 성당은 1131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두 개의 첨탑에 전면에 3개의 아치 형태의 모양을 가진 고딕양식 건물로 재건축된 올로모우츠를 대표하는 건물로 1141년 이미 주교좌 성당이 되었으며 올로모우츠가 대교구로 확대된 이후 대주교좌 성당으로 이 지역 카톨릭 신앙의 중심이 되는 성당인데 역시 웅장한 규모가 주위의 다른 성당들을 압도했다.
올로모오츠는 30년 전쟁 끝나고 도시 재건 과정에서 화재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바로코 양식의 6개의 분수가 도시 곳곳에 있어 분수의 도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왼손에 올로모우츠의 상징인 독수리 방패를 가지고 있는 1688년 완공된 헤라클레스 분수, 올로모우츠를 발견했다는 카이사르를 기념하기 위한 카이사르 분수, 1707년 준공된 모라비안 바로코 양식이라는 주피터 분수, 올로모오츠 분수 중 가장 아름답다고 칭해지는 그리이스로마 신화의 상업과 교역의 신, 전령의 신인 메르쿠리우스 또는 헤르메스를 의미하는 머큐리 분수, 올로모오츠 최초의 식수원으로 1683년 올로모우츠에 최초로 세워진 삼지창을 휘두르는 모습의 그리이스 신화에서 포세이돈이라 불리는 넵튠 분수, 그리이스 신화의 반인반어인 트리톤과 돌고래가 조개를 들고 있는 트리톤 분수 등 6개 분수를 모두 찾아 사진에 담았다.
그리고 고린도 출신 부자인 아리온의 아름다운 노래에 감동한 돌고래가 아리온의 재산을 노리고 아리온을 바다에 던진 사람들로부터 아리온을 건져주었다는 아리온 전설에 따라 만들어진 아리온 분수도 보았는데 역시 최근에 만들어진 분수여서 그런지 다른 분수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올로모오츠는 간선도로를 제외하면 중앙선도 없고, 트램과 자동차가 같은 길을 다니며 심지어 광장에도 차가 들어오는 등 차로와 인도의 구분이 없는데도 사고 없이 원활한 교통이 유지되는 것이 신기했다.
점심을 먹기 전 올로모오츠 구시가지를 다 둘러보고 베트남 쌀국수로 점심을 먹고 오후는 호텔에서 사무실 일을 했는데, 인터넷이 늦어 도저히 일이 진행이 되지 않았다. 체코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올로모오츠까지 왔는데 은진이가 사는 곳은 한 번 가봐야 할 것 같아서 4시가 넘어 은진이에게 줄 짐을 정리해서 은진이 기숙사가 잠깐 다녀온 후 은진이가 추천하는 호텔 근처의 식당에서 푸짐하게 저녁을 먹었으나 프라하에 비하여 가격은 저렴했다.
내일은 예정에 없던 브르노를 방문할 계획인데 브르노에서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할지 전혀 정해진 것이 없다.
얀 후스와 맥주 그리고 프라하 + 5
원래 계획은 올로모오츠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 프라하로 가려고 했는데 올로모오츠는 어제 충분히 다 돌아본 것 같아서 아침에 올로모오츠에서 모라비야 지방의 최대 도시이자 체코 제2의 도시인 브르노를 들러 잠시 둘러본 후 프라하로 가기로 계획을 급하게 수정했다.
그래서 브르노 여행은 정말 아무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하는 해외에서의 첫 여행이다.
어제는 지인이와 돌아다니긴 했지만 식사는 은진가 함께 했는데 브르노는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지인이와 둘만 하는 여행이다.
다시 올로모오츠를 올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올로모오츠는 참 매력적인 도시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역사를 간직한 유적들이 곳곳에 산재되어 있고 그 역사를 품은 돌길 위에 사람과 트램 그리고 자동차가 어울려 평화롭게 공존하는 곳. 사람들도 프라하에 비해 여유롭고 친절하게 느껴졌다. 요즘 유행인 한 달 살기에 적합한 도시인 것 같고, 은진이가 학교를 잘 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진이가 끊어준 9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조금 더 달려 브르노에 도착해서 우선 캐리어를 보관소에 맡기고 5시간에 걸친 브르노 관광을 시작했다.
브르노에는 가끔 악어를 형상화한 것이 보이는데, 악어를 본 적이 없는 브르노 시민들이 악어를 용이라고 생각하고 브르노 드래곤이라 불렸다고 한다.
먼저 천문시계와 마리아 칼럼 등이 있는 브르노의 가장 중심가인 자유광장으로 갔다. 자유광장에 있는 우주선 모양의 천문시계에는 4개의 구멍이 있는데 매일 11시에 4개의 구멍 중 한 개의 구멍에 구슬이 나온다고 하는데 오늘은 구슬이 나오는 소리만 났고 구슬은 나오지 않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구슬을 찾기 위해 구멍 안을 들여다 보는 등 번잡을 떠는 모습이 보였다.
자유광장에 있는 마리아 프라하 칼럼은 오로모오츠 마리아 칼럼과 같이 흑사병 퇴치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자유광장에서 전쟁이 끝난 것을 상징하는 핑크탱크를 보러 브로노 복음교회 앞으로 갔으나 오래 전 없어졌다고 해서 바로 공원을 가로질러 슈필베르크성으로 갔다.
슈필베르크성은 13세기 건축된 성으로 모라비아 총독의 관저와 요새로 사용되다가 합스부르그가가 브르노를 통치할 때는 감옥 사용되었고,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곳인데, 브르노의 가장 높은 곳에 있어 브르노의 관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오늘도 어제처럼 날씨가 맑지 않아 만족한 풍광을 보지 못했다.
성에서 내려와 성베드로와 성바울 성당으로 가다가 우연히 10-Z 벙커를 발견하고, 300코로나를 주고 관람했다
10-Z 벙커는 원래 독일에 의해 방공호로 만들어졌다가 소련이 핵 벙커로 개조하여 관리하였고, 체코가 민주화되면서 체코군의 관리로 넘어와 2014년부터 일반에 개방된 곳이다.
약 600미터의 벙커를 소련군이 관리할 당시처럼 꾸며 놓았는데, 우리나라에서 더 큰 벙커들을 경험해서 그런지 뭔가 부실하다는 느낌만 들었을 뿐 별 감흥은 없었다.
페트로프 언덕에 있는 성베드로와 성바울 성당은 고딕양식으로 건축되었고, 내부는 바로크 양식으로 매우 화려한 건물로 브르노의 랜드마크와도 같은 곳이지만 주변에 건물들 때문에 성당의 전체 모습을 한 샷에 담기가 어려웠는데 성당 입구에는 성당의 이름과 같이 베드로와 바울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30년 전쟁 당시 브르노는 스웨덴군에 포위되어 있었고, 그 때 스웨덴군은 8월 15일 정오까지 브르노를 점령하지 않으며 퇴각하겠다고 했는데, 이 이야기를 들었던 시민들의 기지로 8월 15일 11시에 종을 12번 울렸고, 종소리를 들은 스웨덴군은 정오가 된 줄 알고 퇴각하였다고 하는 전설과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후 지금까지 이 성당에서는 매일 11시에 12번 타종을 한다고 한다.
성베드로와 성바울 성당을 나오면 13세기부터 양배추 시장이 열렸다는 브르노 광장으로 바로 연결되는데, 오늘도 각종 농산물을 파는 작은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브르노 광장은 브르노 출신인 유전학의 창시자 멘델도 자주 찾았다고 하는데 광장 중앙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파르나스 분수대가 있다.
브르노 광장 한 쪽에는 오로모오츠의 삼위일체 석주를 축소해 놓은 것 같은 석조 조각품이 있었는데 성령님을 상징적으로 비둘기로 표현한 것은 이해가 되었지만, 예수님 뿐 아니라 성부 하나님도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 의아했다.
양배추 시장 인근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 젤라또를 먹은 후 1시간 앞당겨 프라하로 향했지만, 아무런 계획도 정보도 없이 떠난 브르노 여행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3시간 20분이 걸려 프라하에 도착한 후 30분을 걸어 에어비엔비로 예약한 숙소에 도착해서 근처 마트에서 물과 아침에 먹을 음식을 구입했고, 애들은 저녁을 위해 식당에 갔고, 나는 마트에서 구입한 빵과 900원짜리 맥주로 저녁을 대신했다.
얀 후스와 맥주 그리고 프라하 + 6
에어비엔비 숙소는 침대 메트리스가 조금 불편했을 뿐 넓고 지내기에 괜찮은 숙소다.
아침에 서둘러 트램을 타고 버스터미널로 가서 8시 버스를 타고 체스키크롬로프로 향했다.
블타바강이 마을을 전체를 감싸고 도는 체스키크롬로프는 동화 속의 마을이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고성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인데, 실제 방문을 하면 왜 이곳을 동화 속의 마을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다.
크롬로프는 휘어진 강의 둘러싸인 풀밭이라는 뜻으로 모라비야의 모라프스키크롬로프와 구별하기 위하여 보헤미아를 의미하는 체스키를 앞에 붙였다.
체스키크롬로프는 1만 2,000명 정도의 작은 마을에 불과하지만 매년 15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다고 하는데, 모두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한 목적인 것 같다.
버스에서 내려 체스키크롬로프 성 방향으로 가면 처음 보이는 것이 망토다리이다.
망토다리는 체스키크롬로프 입구의 다리로 경사진 성의 상부와 하부를 연결한 다리로 과거에는 요새의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망토다리라고 불리게 된 것은 수리를 하면서 기둥 위에 아치를 덮었기 때문이다.
체스키크롬로프 관광은 화합이라는 의미를 가진 스보르노스키광장에서 시작된다. 이 광장은 구시가지 중심 광장으로 고딕, 르네상스, 바로코, 로코코 양식의 채색이 화려한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하는데 나는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이 광장에도 올로모오츠와 브르노와 같이 흑사병에서 살아남은 것을 기념하는 마리아 칼럼이 서 있는데 기둥 윗부분은 기도하는 마리아상이, 아래에는 8명의 성인이 조각되어 있다.
광장 근처 뿐 체스키크롬로프 전역에 관광객이 매우 많은 곳이지만 도시의 특성을 지키기 위해 패스트푸드점은 허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스보르노스키 광장에서 체스키크룸로프 성으로 가기 전에 체스키크룸로프의 뷰포인트 중 한 곳인 세미나르니 정원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스보르노스키광장에서 체스키크룸로프 성 방향으로 가면 라트란 거리를 연결해 주는 나무로 만든 다리인 이발사의 다리를 만난다.
이 다리 중간에는 예수님의 동상과 함께 홍수의 성인인 얀 네포무츠키의 동상이 서 있는데, 이 다리에는 슬픈 전설이 내려온다.
정신병을 앓고 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아들이 체스키크롬로프에서 요양 중 결혼한 아내를 죽이고도 자신이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채 다른 사람을 의심하여 죽이자,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죽은 아내의 아버지인 이발사가 딸을 죽인 살인자로 자처하여 희생되었는데 이후 사람들이 자신을 희생한 이발사를 기념하기 위해 다리를 만들고 이발사의 다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발사의 다리를 건너 도둑이라는 뜻의 라트란 거리를 걸어가면 바로 체스키크룸로프 성의 입구인 레드 게이트에 도착한다.
레드게이트는 체스키크롬로프성의 정문으로 체스키크롬로프를 지배한 로젠베르크 가문의 상징인 장미 색깔을 칠하기 시작함으로써 레드게이트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체스키크롬로프 성은 13세기 무역을 위하여 건축되기 시작한 성으로 보헤미아에서 프라하 성 다음으로 큰 성으로 세계 300대 건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13세기 고딕양식으로 건축되었다가 이후 바로크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으로 증축되었고, 18세기 로코코 양식의 실내장식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성 입구 앞 해자에는 18세기 초부터 곰을 키우기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우리도 두 마리의 곰을 볼 수 있었다.
성은 1정원과 성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된 54.5m의 높이의 흐라텍 타워, 2정원과 하부 성, 그리고 망토다리 상층부를 지나서 3, 4정원과 상부 성으로 나누어지는데 성 안의 정원은 크게 볼 것이 없었지만 성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환상적이었다.
체스키크롬로프 성 안의 벽들은 벽돌을 쌓은 것처럼 그림을 그리는 스그라피토 기법으로 장식되었는데 이 기법은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했다고 한다.
망토다리를 건너 상부 성까지 관람을 하고 체스키크롬로프 성에서 나가면 약 11헥타르의 넓이의 유럽에서 가장 넓은 정원의 하나인 자메츠카 정원을 만날 수 있다.
17세기 바로코 양식으로 조성되었다가 19세기에 영국 양식으로 개조된 이 정원은 체스키크롬로프 성 외부 서쪽에 조성된 정원으로 왕족들의 쉼터라고 불리는데 중앙의 분수를 기준으로 윗 정원과 아랫 정원으로 구분되는데 온통 푸른 식물들로 조성된 정원이 눈을 시원하게 했다.
자메츠카 정원을 둘러본 후 1309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439년에 완공된 체스키크롬로프를 대표하는 고딕양식의 성당인 성비투스 성당을 보았으나 다른 도시들에서 본 성당과 별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성당까지 둘러본 후 한국인이 많이 가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만족한 식사를 하고, 체스키크룸로프의 9개 성문 중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성문인 부데요비츠카 문을 통해 체스키크롬로프를 나와 버스를 타고 프라하로 돌아왔다.
프라하로 돌아와서는 프라하의 야경을 보기 위해서 유람선을 탔는데 유람선에서 맞는 블타바강의 바람은 시원했지만 멀리 보이는 프라하성 외에는 흔히 유럽의 3대 야경이라는 프라하의 야경에 대한 기대를 충족하기에는 매우 부족했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숙소에서 출발한지 14시간만에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도 피곤한 하루였다.
얀 후스와 맥주 그리고 프라하 + 7
아침에 좀 여유 있게 나와 구시가 광장의 천문시계를 지나 까를교로 갔다.
프라하 시청사의 천문시계는 1410년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천문시계인데 아래 판(플라네타륨)은 바늘이 1년에 한 바퀴씩 돌며 백성들에게 그 시기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윗판(칼렌다륨)은 당시 라틴어를 아는 지식인들을 위한 시계로 전체를 24시간으로 나눠 시침과 분침이 움직이는데 시간 뿐 아니라 날짜와 밤낮의 길이까지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계가 유명한 것은 시계 자체보다 매 시 정각에 있는 퍼포먼스다. 아래에 인간 군상들을 묘사한 인형들이 있는데 정시에 죽음이 다가온다는 의미에서 해골이 나와 줄을 당기면 동시에 위에 있는 창들이 열리면서 12사도가 나와 아래 있는 사람을 조용히 쳐다보면서 사라지고 새벽을 상징하는 황금수탉이 울면서 모든 퍼포먼스는 순식간에 끝난다.
매우 깊은 의미가 있는 1분 남짓의 퍼포먼스지만 관광객들은 퍼포먼스 자체에 환호할 뿐 그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았고, 나 또한 몇 번의 퍼포먼스를 보면서도 퍼포먼스 자체에만 집중하였지 퍼포먼스가 주는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한 적이 없는 것 같다.
프라하의 또 하나의 관광명소인 화약탑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나누는 성문에 있는 탑으로 18세기에 화약을 보관해서 붙은 화약탑으로 불리지만, 현재 수리 중이어서 여러 차례 주변을 거쳐 갔지만 모습은 보지 못했다.
천문시계를 보고 까를교를 갔는데, 까를교는 블타바 강에 있는 621미터의 석조 다리로 프라하의 상징과 같은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불리기도 한다. 14세기 보헤미아 왕 까를 4세에 의해 건축이 시작되어 까를교라고 불리며 까를교 입구에는 까를 4세의 동상이 있다.
다리 상판에는 예수님을 비롯한 30개의 바로코 양 조각상이 있는데, 각 조각상들은 미술에 문외한인 나도 예술적 수준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 조각상들 중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이야기하라는 왕의 요구에 응하지 않아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 4세에 의해 블타바 강에 던져져 순교한 얀 네포무츠키 신부의 조각상이 특히 유명하며 많은 사람들이 그 조각상을 만지며 소원을 빌어 조각의 일부가 황금색으로 빛나는 부분이 있다.
까를교의 교탑 중 구시가에 있는 교탑은 고딕 건축의 진수를 보인다고 평가를 받는데, 이 교탑은 반종교개혁 시기 빌하호라 전투에 패배한 지도자들의 목을 10년간에 매달아 놓은 아픈 역사가 있는 곳으로 체코의 종교개혁과 관련된 중요한 유적지 중 하나이다.
까를교를 건너면서 까를교의 정취를 느낀 후 트램을 타고 보헤미아 왕국의 궁전으로 사용된 세계 최대의 고대 성인 프라하성으로 향했다.
구시가가 얀 후스의 영향을 크게 받은 지역이라면 프라하성은 종교개혁 시기에도 카톨릭의 영향력이 더 강했던 곳으로 후스 전쟁 중에는 카톨릭 종교회의가 열리기도 했던 곳이다.
트램에서 내려 프라하성으로 들어가기 전 인근에 있는 12세기에 세워진 스트라호프 수도원으로 가서 수도원 양조장에서 직접 만든 맥주와 함께 브런치를 먹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가장 괜찮은 식사였다.
12시에 프라하성 근위병 교대식을 보고 프라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1344년부터 약 600년에 걸쳐 고딕양식으로 건축된 길이 124미터, 높이 100미터의 성비투스 성당을 관람했다. 웅장한 크기와 높이 때문에 휴대폰으로는 한 장의 사진으로 담기 힘든 거대한 규모다.
성비투스 성당은 보헤미아 왕국 최고의 성당답게 첨탑 꼭대기에는 보헤미아의 상징인 사자가 있고, 성당 안에 바츨라프와 얀 네포무츠기 등 역사적 인물들의 묘가 있다고 한다.
특히 성비투스 성당은 각 시대별로 제작된 스테인드 글라스가 유명한데, 특히 알폰스 무하가 유리에 그림을 그려 구워낸 스테인드 글라스가 유명하다고 해서 찾아 보았다.
성당을 나와 구왕궁 방향으로 오면 성당의 문 중 구왕궁과 마주한 문이 있는데 이 문은 황금 빛으로 최후의 심판 모자이크가 있어 황금의 문으로 불리고, 성당 측면에는 두 개의 시계가 설치되어 있는데, 위의 시계에는 시침만, 아래의 시계에는 분침만 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구왕궁은 12세기부터 16세기까지 보헤미아의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왕궁으로서는 매우 검소하게 느껴졌다.
또한 구왕궁은 1618년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된 제2차 프라하 투척사건이 발생한 곳으로 이 전쟁에서 보헤미아 군대가 1620. 11. 8. 프라하성 부근 빌하 호라 전투에서 신성로마제국 군대에 패한 후 보헤미아 왕조 몰락하고 체코는 합스부르크가의 신성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반종교개혁의 물결이 덮치게 되었다.
구왕궁을 나오면 만나는 성 이르지 성당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프라하성에서 두 번째로 건축된 건물이며 현재 프라성에 남아있는 건물 중에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성당 안에 보헤미아 왕들의 묘도 있으나 성비투스 성당에 비하면 소박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성비투스 성당에서 나오면 연결되는 황금소로는 원래 프라하성의 군인 막사가 있던 지역이었으나 16세기 후반 연금술사, 금은세공사 모여 살게 되면서 좁은 골목을 황금소로로 불리게 되었고, 중간에 카프카의 집필실도 있고, 당시의 무기나 생활상 등이 전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특별히 볼 것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성 동편 황금소로 근처에 있는 백탑(빌라비예쉬) 안에 있었던 감옥에는 초기 많은 후스파 교인들이 수감되었던 곳이었다고 하는데, 황금소로 마지막에 지하 감옥을 재현해 놓은 곳이 그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조금씩 내리기도 해서 프라하성에서 좀 빨리 나와 팔라디움 백화점으로 가서 지인들에게 줄 간단한 선물을 구입한 후 숙소로 돌아와 저녁시간까지 숙소에 있는 사우나 기기에서 사우나를 하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저녁은 꼴레뇨로 유명한 포커스에 가서 꼴레뇨와 소세지를 먹었다. 스트라호프 수도원에서 마시는 맥주가 체코에서의 마지막 맥주일 줄 알았는데, 포커스에서 양조하는 맥주를 보고는 마실 수밖에 없었다.
저녁을 먹고 페트린 공원을 가려고 했으나 푸니쿨라가 운행하지 않아 포기하고, 유대인 구역으로 가서 굴뚝빵을 하나 사서 나눠 먹었고, 금속으로 만든 회전하는 카프카 조각상을 보고 근처 마트에서 선물용 과자 등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얀 후스와 맥주 그리고 프라하 + 8
일상에서 벗어난 꿈 같은 시간도 모두 지나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여행을 시작할 때는 이 시간이 올 것 같지 않지만, 우리의 인생이 마지막을 향해 계속 달려가는 것처럼 여행의 시작 때부터 여행의 끝은 계속 다가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아침이었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짐을 싸고, 숙소를 나오기 전에 석 달 정도 혼자 생활해야 하는 은진이를 위해 하나님의 보호를 간구하며 축복기도를 했다.
짐을 에어비엔비 사무실에 맡기고,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비가 많이 내려 다른 곳은 가지 못하고, 구시가지 광장으로 가서 은진이와 함께 나를 프라하로 이끈 얀 후스의 동상을 둘러보며 얀 후스의 진리에 대한 갈망을 잠시 묵상하고, 구시청 천문시계의 퍼포먼스도 마지막으로 보면서 퍼포먼스가 주는 교훈을 생각했다.
점심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얀 후스의 개혁시대에 개혁의 중심되었던 교회였으나 방문하지 못했던 눈 속의 성모마리아 교회를 찾아서 출국 전 얀 후스의 종교개혁과 관련하여 찾아보고 싶던 교회들은 모두 방문했다.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얀 후스의 종교개혁과 관련된 곳을 방문하기는 했으나 그곳의 역사적 의미 등은 제대로 알 수 없어 만약 다음에 다시 프라하에 오게 된다면 공부를 더해서 얀 후스의 발자취와 그 의미를 좀 더 정확하게 알고 싶다는 미련이 남는 여행이었다.
여행에서 마지막 식사는 한식으로 했다. 나와 지인이는 상관 없지만, 다시 혼자 생활해야 하는 은진이에게 제대로 먹지 못할 한식을 먹여서 보내고 싶어서였다. 사극을 보면 옛날 어머니들이 먼 길을 떠나는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따뜻한 밥을 먹여 보내는 마음에 공감이 되었고, 이렇게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조금은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 날씨는 좋지 않았지만 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구시청의 시계탑에 올라 프라하 시내를 마지막으로 조망하고, 카페에서 조금 시간을 보낸 후 공항버스를 타고 바츨라프 하벨 공항으로 향했다.
7박 9일의 여행, 체코 도착 기준으로 정확하게 일주일을 체코에 있으면서 두 딸과 여행을 했다. 가족 전체가 아닌 두 딸과의 여행은 아마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은데, 피곤했지만 그 피곤을 몇 배 뛰어넘는 즐겁고 행복한 일주일이었다.
프라하에서 5박을 했지만, 드레스덴, 올로모오츠, 브르노, 체흐키롬노프 등을 방문하다 보니 패키지 여행만큼이나 이동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피곤했지만, 체코 여행에서는 불가피한 일정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프라하를 비롯한 체코의 주요 도시들을 방문하여 역사 유적과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었고, 위대한 종교개혁자 얀 후스와 얀 후스의 하나님에 대하여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서 내가 갈 길에 대해 생각하며 기도할 수 있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일주일 간의 체코 여행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언제일지 모르는 다음 가족여행이 벌써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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